17번째 성찰 에세이-공과 과는 분리될 수 있는가
인간 평가의 윤리적 모순과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인간은 누구나 복합적인 존재다.
위대한 예술가도, 혁신적인 기업가도, 존경받는 정치인도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업적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들이 남긴 어두운 흔적에 당혹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공(功)’과 ‘과(過)’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서정주의 시를 감상하면서 그의 친일 행적을 지워도 되는가?
이건희의 경제적 기여를 말하면서 그의 사생활을 외면해도 되는가?
공과 과는 분리 가능한가, 혹은 분리해서는 안 되는가?
1. 공과 과, 서로 다른 좌표의 존재인가
한 가지 관점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따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일명 ‘업적 분리론’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은 예술로, 성과는 성과로, 인간은 인간으로 보자는 주장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세잔은 가족을 버렸지만, 그의 그림은 박물관에 걸려 있다.
마이클 잭슨은 수많은 논란을 안고 죽었지만, 음악은 여전히 울려 퍼진다.
스티브 잡스는 성격이 괴팍했지만, 아이폰은 여전히 혁신의 상징이다.
이 시각은 인간의 복합성을 인정하되, 판단의 범주를 나누자는 현실적 제안이다.
‘인간 서정주’는 역사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시인 서정주’의 작품 세계는 독립적으로 감상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분리를 통해 우리는 면죄부를 발급하거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게 되는 경향에 빠진다.
그의 시는 너무 아름다우니까, 그의 회사는 너무 큰돈을 벌었으니까.
그래서 그 모든 그림자를 덮어두자고?
2. 공과 과는 연속선상에 있는가
반대의 입장은 ‘전체 맥락 속에서 판단하자’는 연속성의 윤리다.
인간은 공과 과를 따로 떼어낼 수 없으며,
특히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물일수록 도덕성과 성과는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정주의 시어들이 조국을 배신한 정서와 맞닿아 있다면,
그의 문학은 그 과오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고,
이건희가 일군 삼성의 신화 역시
권력과 자본의 비윤리적 동맹과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시각은 인간을 역사적 맥락과 도덕적 기준 속에서 판단하려 한다.
성과는 ‘어떻게 얻었는가’를 통해 완성되며,
그 과정에 대한 도덕적 평가 없이는 진정한 공도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3. 공과 과를 평가하는 것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평가의 주체에 대한 메타 질문으로 이어진다.
공과 과를 가르는 기준은 시대, 사회, 문화,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
한 시인의 친일은
그 시대에선 생존 전략이었을 수도 있고,
지금에 와선 명백한 역사적 죄책이다.
한 기업인의 사생활은
과거엔 사적인 일이었지만,
오늘날 기업 윤리의 거울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절대적인 평가 기준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때그때 편리한 기준을 가져와
‘공은 공, 과는 과’ 혹은 ‘공도 과에 의해 취소’라고 말하고 있는가?
4. 결론 – 평가의 목적은 단죄가 아니라 성찰이어야 한다
공과 과는 분리될 수도, 완전히 통합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떤 태도로 다루는가다.
서정주의 시를 읽되,
그의 친일을 아는 상태에서 읽는 것.
이건희의 경영 성과를 말하되,
그가 놓친 윤리를 함께 돌아보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성숙한 방식으로 인물을 평가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의 공은 존중하되, 과를 침묵하지 않고,
과를 비판하되, 공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렇게 우리는 어떤 인물을 평가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 어떤 사회를 바라는지를 드러내게 된다.
결국 인간은 평가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총합으로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존재다.
그 기억이 균형과 진실 속에 있다면,
그 평가 또한 정직한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